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한국 민주화에 굉장히 큰 기여를 했고,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조짐은 사건이 벌어지기 반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1972년 10월 유신에 의하여 종신 집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유신정우회, 긴급조치 등을 수단으로 하여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한국을 지배했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유신 체제는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사살되면서 막을 내린다. 박정희의 사망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같은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완전 장악한다. 이때 대학방학을 이유로 이 쿠데타에 대한 지식인 계층의 대처와 항명서는 뒤늦게 이어진다. 결국 대학가가 개학을 맞이한 3월에서야 신군부에 의한 군부장악과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지게 되었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더해서 군사훈련반대 움직임이 일어난다. 유신정권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아야했다. 박정희가 죽은 이 때 학생들은 당연히 이 불합리한 훈련에 반발했다. 그러나 이 반발은 어찌어찌하며 가라앉았고, 총학생회는 훈련장으로 가는 후배들을 독려했다. 이 와중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현 새누리당 의원)은 “정부에서 안개정국을 해결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실력행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라며 5월13일을 그 한계로 못 박았다. 의도한 발언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학생회의 이 발언은 곧 전 대학으로 퍼졌고, 예정된 날 운동권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울의 봄’이 시작된다. 특히 이는 5월15일에 절정을 이루어서, 서울역 광장에는 서울 32개 대학에서 약 10만 여명의 학생과 군중들이 모였다. 잘하면 청와대까지 진출할 분위기였다.
그러나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잘하면 민주화에 성공할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가 왔다는 소문에 해산 결정을 내리게 된다. 당시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반발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귀가하였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려대가 해산하며 서울의 봄은 일단락 지어졌다. 이에 자신감이 붙은 전두환 정권은 대학생들의 해산 후 5월17일자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주모자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했다. 이 사건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하여 민주화를 10여년 뒤로 늦춘 사건으로 평가된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위화도 회군에 맞먹게 크게 평하기도 한다.
이처럼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소위 사북사건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국회에서도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본회의 개최를 결정하게 되자 신군부는 이를 막고 정권장악을 기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두환, 노태우 등의 압박으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 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5월17일 새벽에 계엄군은 전국 대학교의 학생운동권 관련 학생들을 모조리 검거했고, 5월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초법적 사태가 일어났다. 국회 또한 폐쇄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광주에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이 5월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했다. 5월14일 광주에서 민주대성회라는 이름의 시위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남대학교 학생회장인 박관현이 연설을 한다. 민주대성회로 일어선 학생들은 5월15일 서울에서 큰 시위가 열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호응하여 5월16일에 학생들은 거리 시위로 나서고, 이것이 훗날 촛불집회 때도 알려진 횃불시위이다. 이 시위는 별다른 충돌 없이 조용히 끝났으나, 여기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회 측은 만일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서 만나자는 행동지침을 내렸다.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 사이에서 최초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에 계엄군은 폭력진압으로 맞섰다.
이 일로 학생들은 계엄군에게 쫓기면서 시내로 나와 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계엄군은 오후 3시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을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시위 학생 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했던 일반 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였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심지어는 여관에서 머무르고 있던 외지인까지 끌려나왔고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 언어 장애인이 대답을 안한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구타당해 사망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러한 폭력에 광주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이것이 학생과 시민이 연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에 긴장한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발포하는 등 강력하게 탄압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광주 시민들은 10여일 간 처절한 저항을 벌였다. 항쟁 10일째인 1980년 5월27일 0시. 계엄군이 시내의 전화선을 차단하고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새벽 3시에 한 여성이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며 우리를 도와달라는 애절한 내용의 가두방송 소리가 광주시내 곳곳에서 들려왔다. 새벽 4시가 되자, 계엄군은 전남도청 앞을 완전히 포위했고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결국 아침이 되면서 광주시 전역은 계엄군에게 장악되었고 5·18민주화운동도 막을 내렸다.
당시 발표한 공식 피해자는 121명이었으나, 후에 192명으로 수정 발표되었다. 부상자 또한 공식 집계로 852명이었으나, 수없이 많은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수치는 최소 집계에 불과하다. 사건당시의 신군부의 통제로 인해 언론매체는 ‘광주 사태’로 칭했으나 군부 정권이 끝난 이후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소위 신군부가 주장했던 ‘광주 사태’ 이후로 전두환 군부정권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이외에도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선언을 한 직후, 8월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 』
http://www.sagunin.com/ 사건인 뉴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격어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폭동이라고 말하고 겪어본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가 일어난 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때는 그들은 무슨 마음이였을까? 수십 수만명들이 모여 아닌걸 아니라고 하는 것...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그러한 것이였다
만약 2017년 촛불집회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때리고 잡아가고 죽임을 당했다면 그들도 빨갱이라고 했을까? 이유없이 끌려가고 총을 맞고 죽임을 당한 민간인들... 또 그걸 보았고 겪어보았던 사람들... 사건에 중심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그들이 잘 못이였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아직도 외상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28년이 지난 지금에도... 저녁 노을이 질때면 심장이 두근거리며 이유없는 불안이 엄습해 올 때를....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 되새김질은 일어나지 않기 위해 계속 되야하는 것이지 손가락질하고 그들을 비방할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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